
2000년 개봉한 영화 〈리베라메〉는 연쇄 방화범 이수와 소방관 상우의 대결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재난 스릴러입니다. 학대받은 과거를 가진 이수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구원"을 실천하며 도심 곳곳에 화재를 일으키고, 이를 저지하려는 소방관들의 치열한 사투가 펼쳐집니다. 23년 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주유소 폭발, 병원 화재 등 대규모 재난 장면의 완성도는 현재 기준으로도 놀라운 수준입니다.
이수의 비극적 신념, 왜곡된 구원의 논리
영화 속 연쇄 방화범 이수는 단순한 악역이 아닌 복합적인 캐릭터로 그려집니다.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심한 학대를 당했던 이수는 결국 누나의 도움으로 그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나가 불길 속에서 사망한 사건은 그의 인생관을 완전히 뒤바꿔놓았습니다. 이수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자 구원이 되었습니다.
출소 후 이수는 정신병동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치료사로 일하며 겉으로는 평범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를 믿고 지지하는 명준 의사는 과거 일곱 살이었던 이수를 방화범으로 볼 수 없다며 그를 옹호했습니다. 하지만 이수는 자신이 학대받았던 것처럼 고통받는 아이들을 발견할 때마다, 그들의 부모나 가해자들을 화재로 응징하는 방식으로 "구원"을 실천합니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던 가정, 학대의 증거가 담긴 사진들, 그리고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작성된 아이들 명단까지, 이수의 범죄는 철저히 계획되고 타깃이 명확했습니다.
이러한 이수의 신념은 명백히 왜곡된 정의감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한테 구원을 요청했는 줄 알아요?"라며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분노를 드러냅니다. 학대받는 아이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실망감이 극단적인 방화로 이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무 죄 없는 사람들과 소방관까지 희생되는 참극이 발생합니다. 영화는 이수 캐릭터의 서사를 통해 학대 피해자가 어떻게 가해자로 변질될 수 있는지, 그리고 개인적 트라우마가 사회적 재난으로 확대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더 깊이 있게 다뤄졌다면 더욱 입체적인 악역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 캐릭터입니다.
소방관의 희생정신, 목숨을 건 사명감
영화 〈리베라메〉의 진정한 주인공은 소방관 상우를 비롯한 소방대원들입니다. 상우는 화재 현장에서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고 생존자를 끝까지 찾아내는 예리한 직감과 사명감을 가진 인물입니다. 아파트 화재 현장에서 405호에 갇힌 생존자를 구출하는 과정, 주유소 폭발 사건에서 희수의 흔적을 추적하는 과정 등 상우는 항상 한 발 앞서 위험을 감지하고 동료들을 이끕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상우의 파트너 현태의 심리 변화입니다. 현태는 "물속에서 죽고 싶지 않아요"라며 소방관 일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합니다. 위독한 동료를 먼저 구출하지 않은 상우에게 불만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는 소방관들도 결국 두려움을 느끼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마스날 출동 명령이 떨어지자 "애들도 오랜만에 외출인데... 얘들아 미안하다"라며 가족과의 시간을 포기하고 현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은 소방관의 숭고한 사명감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영화는 소방관들의 열악한 처우에 대해서도 조명합니다. "경찰이랑 군인은 다 공짜인데 우리 자비를 내라는 게 말이 되는 소리예요?"라는 대사는 2000년 당시 소방관들이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면서도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모순된 상황, 그럼에도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소방관들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희수에 의해 희생된 동료 소방관에게 경례하는 대원들의 모습은 그들의 연대감과 희생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관객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소방관들의 활약과 희생은 단순한 영웅 서사를 넘어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얼마나 빚지고 있는지를 상기시킵니다.
2000년대 재난영화, 시대를 앞선 기술력과 완성도
〈리베라메〉가 개봉한 2000년은 한국 영화계에서 재난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도되던 시기입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강점은 23년 전 영화라는 것을 믿을 수 없는 높은 완성도의 재난 장면들입니다. 특히 주유소 폭발 장면은 실제 주유소를 건설하고 폭파하는 방식으로 촬영되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제작비와 기술력이 투입된 시퀀스였습니다. 불길이 치솟고 차량들이 연쇄 폭발하는 장면의 스케일은 현재의 CG 기술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수준입니다.
병원 화재 장면 역시 압도적입니다. 장엄한 오케스트라 음악과 함께 병원 건물이 폭발하는 장면은 시네마틱한 연출의 백미입니다. 보일러실에서 시작된 화재가 스프링클러 시스템을 통해 건물 전체로 번지는 과정, 정신병동까지 불길이 번지며 아이들이 위험에 처하는 상황 등은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로 긴장감을 극대화합니다. 이수가 스프링클러의 밸브를 잠그며 소방관들을 조롱하는 장면은 방화범의 치밀함과 잔인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효과적인 연출입니다.
아쉬운 점은 시나리오를 읽어보면 편집 과정에서 변경된 부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수 캐릭터의 배경과 동기를 설명하는 부분이 상영 시간 문제로 축소되면서 다소 어정쩡한 악역이 탄생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만약 감독의 원래 의도대로 더 긴 러닝타임으로 제작되었다면 이수의 내면 갈등과 상우와의 대결 구도가 더욱 입체적으로 그려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개봉 시기도 불운했습니다. 앞서 개봉하고 흥행에 실패한 〈사이렌〉의 여파로 소방관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피로도가 높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리베라메〉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보면, 2000년대 초반 한국 재난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의미 있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합니다.
영화 〈리베라메〉는 학대 트라우마로 왜곡된 신념을 가진 방화범과 사명감으로 무장한 소방관들의 대결을 통해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지 질문합니다. 23년 전 작품임에도 재난 장면의 완성도는 여전히 인상적이며, 열악한 처우 속에서도 생명을 구하는 소방관들의 이야기는 깊은 울림을 줍니다.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한국 재난 영화사에서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긴 작품입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www.youtube.com/watch?v=HnN7wj4Uojw